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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의 끝

from 무라쟈니 하루키 2008/01/02 12:56


그것은 매우 긴 터널이었다.
터널이 터널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시작점과 종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시작점과 종점이 없으면 그것은 터널이 아닌 굴인 것이다. 터널에는 분명 끝이 있다. 나는 시작점을 지났으므로 의심의 여지 없이 종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종점이 있을 거라 믿고 있다. 어느 새 나는 터널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미 그것은 십 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탓이다. 오래된 기억으로서 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겠지만 보통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꺼내어 보기란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잘 하던 것을 잘 못하게 되는 것.
하지만 몽롱한 상태에서의 기억이 어떤 기억보다도 강렬하게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그 당시의 다른 기억들은 모두 어렴풋이 생각나지 않지만 터널입구의 기억만은 내게 문신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백 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사립고의 졸업을 기점으로 나와 내 친구들은 어느 순간에 훌쩍 각자의 터널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들은 학교를 비추던 따사로운 오후 햇살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즐기고 싶지 않았었던 것 같다. 세상은 언제나 밝았으며 구름과 시간은 사이 좋게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무료했고 세상은 필요 이상으로 눈부셨으며 모든 것은 나른하기만 했다. 나는 잔디밭에 누워 어느 새 잠이 들었다.

“딩동” 하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미처 잠이 채 깨지 않은 채로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이 다소 환상적인 현실을 만들어주다가 이내 완연한 현실로 돌아왔다.
“전방에 터널이 있습니다. 길안내를 종료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내 눈앞에 보이는 네비게이션의 액정화면에는 터널의 진입을 알리는 화면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액정화면 밝기 유지시간이 초과되었는지 이내 조명이 꺼져버렸다. 나는 모델을 알 수 없는 승용차의 오른쪽 뒷자리에 누워있었다. 승용차는 매우 차분하게 전진하고 있었으며 운전석에는 형체가 없는 검은 얼굴을 가진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소리 없이 자동차를 조작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내가 말했다.
“터널이오” 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당신이오. 당신 자신.” 하고 그가 대답했다.
나는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아 쓰고 상체를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그는 터널의 맨 오른쪽에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자, 나는 이제 가야하오. 여기서부터는 직접 운전해 가시오.” 하고 그가 말했다.
“잠깐. 나는 운전을 할 줄 몰라.”
“세상 누구도 운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소.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운전이란 것은 누군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오.”
“나는 면허가 없어. 법을 어기게 된단 말이야” 하고 내가 놀라며 말했다.
“여기는 법이라는 것이 없소. 오직 당신만이 이 터널 안에 존재하오. 당연히 경찰 같은 것은 없소.”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차창 밖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땅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차선이 있었고 천정에도 차선을 그리듯 일정한 간격의 형광등이 끝없이 매달려 있었다.
“자, 이제 가는 게 좋겠군. 지금 당장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겠지만 곧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요. 당신만 이런 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하면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소. 아무튼 잘 해보시오. 행운을 비오.”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곧 차에서 내려 뒤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려 고개를 돌렸지만 터널 입구의 강한 빛 때문에 이내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이렇게 나는 터널에 들어오게 되었다.

터널은 불친절했다. 터널 안의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으며 형광등이 켜져 있지 않은 구간도 여러군데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말대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운전에는 비교적 능숙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차에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들이 많이 남았지만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의 차가 아니라고 자위하며 차에 난 상처에 대해서는 곧 체념하고 말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터널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차를 잠시 세우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꿈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꿈에서 여자를 만났고, 꿈에서 여행을 다녔다. 꿈에서의 현실. 돌이켜보면 꿈만 같은 기억들은 실제로 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터널에는 따로 낮과 밤이 없으므로 꿈을 꾸는 시간이 내게는 낮이었다. 꿈에서 깨면 유독 햇살만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햇살을 너무나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십 년이 흘렀다. 이제 나는 제법 운전에 능숙해졌고 어둠에 익숙해졌으며 마음 또한 성숙해졌다. 꿈에 자주 보이던 친구들은 점점 보기 힘들어 졌고, 터널에 적응하면 할수록 나 또한 더 적게 꿈꾸게 되었다. 빨리 달리면 이 지긋지긋한 터널을 빨리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최고 속도로 달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몇 일씩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고 주저앉아 울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조금씩 체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음악이 계속되는 한 춤을 추라는 누군가의 문장처럼 나 또한 운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터널이 계속되는 한.

‘30세 – 기점기준’
이렇게 써진 표지판을 막 지났다. 터널의 끝이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더 자주 잠을 청해 꿈을 꿀 것이다. 또한 언젠가는 그토록 갈망하는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다시금 마음껏 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운전대를 다시 잡은 나는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차 안에 기분 좋은 음색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 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힘껏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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